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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업을 하다가 벽에 붙여 있던 스케치가 눈에 들어왔다.
소리를 듣고 스케치를 표현한 것들 이었는데. 그 중하나 소라 모양으로 나타낸 그림이 있었는데 그것을 공간으로 표현 하면 재미있을꺼 같다. 소라모양으로 안으로 들어 갈 수록 좁아지고 들어갈 때 마다 올록볼록한 느낌으로 걸어가면서 깊이깊이 들어 갈 수록 어두워지는 것이다. 아니면 반대로 밝아지던가. 우리의 생활속에 있는 것을 주제로 편하게 다가 갈수있는 소제가 좋다. 그렇다고 해서 절대 평범한것은 아니다. 자연과 함께하는 ..안토니 가우디 같다고나 할까? ㅋ 암튼 알리앙스와 라이너로 표현 하려고 했는데 잘안된다. 아~참 ~그래도 백남준의 습작을 보면서 위로를 할란다 ㅋㅋ 우선은 즐기면되니깐 . ![]() ![]() # by 최미성 | 2004/06/06 03:11 | 트랙백 | 덧글(0)
![]() 중독인가? 거의 맨날 친다. 나의 취미이자 영원한 벗 피망쓰~ 공부를 이마이 했음 내가 일등 ㅋㅋ 그치만 맨날 리필 인생이다. 지금동안 쭉보면 그다지 오래 즐기는 것이 잘없었다. 아!~ 있다 있다. 디자인..그림은 4개월간 정말 열심히 했었다. 나도 놀랄정도로. 다 열심히 했겠지만 그 전에 미술학원을 전혀 다니지 않았던 나에겐 4개월이란..엄청 짧았기 땜에 솔직히 열심히 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은 많다. ㅋ 그리고 작년동안 꾸준히 했던 이거 그리고 또 하나 있는데 비밀이다. ㅋ 조만간 우리끼리 동아리 만들까 생각중이다. ㅋㅋ 아~~나태해지는 미리 ㅋㅋ 와이라는지 나도 몰라~아무도 멀라~ ![]() # by 최미성 | 2004/06/05 23:45 | 트랙백 | 덧글(0)
그 남자 네번째 손꾸락에 반지가!!!
설명 소극적 스토킹의 절대적 결과(혼자 좋아서 북치고 장구치다 알고 보니 결국 임자있는 몸인 사람임이 판독돼 사랑 일반에 관해 절망과 포기에 이르는)를 난잡하고 이해 불분명하게 나타내는 ?같은 작품 ![]() 초등생용 연습장 작품 감상 포인트 1 각 아동들의 가슴팍과 신발 그리고 팔 라인 안에 채워진 격렬한 크레파스 선. 2 눈동자를 글씨로 대체하는 어이없는 시도 ![]() # by 최미성 | 2004/06/05 23:17 | 트랙백 | 덧글(0)
![]() ![]() ▒ 서울. 거부의 아들로 태어남 백남준은 1932년 7월20일 서울 종로구 서린동 45번지에서 3남 2녀 가운데 막내로 태어났다. 그의 부친 백낙승(白樂承) 씨는 해방 후 최대 섬유업체인 태창방직을 경영하며 홍콩을 무대로 한 무역상이었다. 그의 부친은 당시 종로 5가와 동대 문 일대 포목상의 절반 이상이 백씨 집안의 소유였을 정도로 섬유업계의 대부 격이었다. ▒ 음악에 천부적인 재능을 보임 백남준은 애국 유치원과 수송 초등학교에 다니던 시절에, "남자가 시끄럽게 피아노를 뚱땅거리면 못쓴다"는 부친의 엄격한 훈계 때문에 공식적으로 피아노를 배울 기회를 갖지 못하였다. 그러나 큰누이 희득(熙得)의 피아노 레슨 시간을 이용하여 어깨너머로 슬금슬금 피아노를 배웠다. 그가 피아노를 제대로 배우게 된 때는 경기 공립 중학교(당시 6년제)에 진학하고 나서부터이다. 당시 경기 중학 음악 교사는 피아니스트 신재덕(申載德) 선생(전 이화여대 음대학장, 89년 작고)이었다. 신재덕 선생은 재주덩어리인 백남준에게 피아노뿐만 아니라 작곡과 성악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한 음악 수업을 시켰다. 특히 이 시기에 작곡가 이건우(李建雨)를 만나 백남준은 음악가가 될 결심을 하게 된다. 백남준은 음악에 대한 재질은 뛰어나서 이건우로부터 사사 받고 있을 무렵에 다섯 개의 간단한 곡을 작곡할 정도였다. ▒ 일본으로 유학 6·25사변이 터지자 그의 집안은 모두 부산으로 피난했으며 거기서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게 되었다. 백남준은 집안의 대이동 등 급격한 변화에도 불구하고, 1951년 도쿄대학 미학과에 우수한 성적으로 입학하였다. 거기서 백남준은 전후 일본의 예술계를 대표하는 인물인 타케우치 토시오(竹內敏雄) 교수로부터 미학을, 노무라 요시오(野村良雄)로부터 음악학을, 모로이 사부로(諸井三郎), 시라이시 아키오(白石顯雄) 교수로부터 작곡을 배웠다. 특히 노무라 요시오 교수는 당시 일본 사회에서는 드물게 기독교인에다 한국의 독립 운동을 지원하였던 경력을 가진 평화주의자였다. 백남준은 그를 매우 존경하였다. 그는 도쿄대학에서 총명한 학생으로 정평이 나 있었으며 주로 음악 서적과 철학 서적을 읽었다. 일본 도쿄대학을 졸업할 즈음, 백남준은 당시 현대 음악의 메카로 알려져 있던 독일로 유학할 것을 결심하였으며 뮌헨 대학 대학원의 음악과 석사 과정에 응모하여 입학 허가를 받아냈다. 독일에 도착한 56년에는 백남준은 뮌헨 대학에서 음악사를 공부하기 시작하였으나 작곡에 관심을 갖고 있던 백남준은 당시 준비 중이던 안톤 베버른에 관한 음악사 석사 학위 논문을 중단하고 보수적인 뮌헨을 떠나 보다 전위적인 음악이 환영받던 프라이부르그로 옮겨버렸다. 그 곳에서 백남준은 작곡가 볼프강 포르트너로부터 작곡의 기본에 관한 다양한 사항들을 배었다. ▒ 뮌헨대학에서 존 케이지를 만남 58년에는 존 케이지와 운명적인 만남이 이루어지면서 그의 예술 인생은 큰 전환을 이룩하게 되었다. 케이지는 서양 음악이 옥타브라는 제한된 음가를 중심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았다. 또 피아노나 바이올린 등 18세기 악기가 내는 소리만을 음악의 영역으로 설정하는 고정 관념에 대하여 반기를 든 가장 적극적인 전위 음악가이다. 그는 종래 음악의 정의를 폭넓게 해체시킨 인물이다. 그의 주장은 백남준이 서양의 전통악기인 피아노와 바이올린을 때려부수면서 공격적인 행위 음악을 전개시키는데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62년 5월에 백남준은 자신의 삶에 많은 영향을 끼친 사람을 만나게 된다. 독일의 뒤셀도르프의 어느 공연장에서 바이올린을 부수는 퍼포먼스를 하였다. 여기서 그는 플럭서스 그룹을 창시한 조셉 보이즈을 만났다. 보이즈는 낯선 독일에 살던 한국인 백남준을 극진히 보살펴주며 동시에 퍼포먼스를 함께 열어 자신과 동반자 관계로서의 예술가의 길을 지켜주었다. 이들의 관계가 결정적으로 가까워진 것은 보이즈가 백남준의 첫 전시에 느닷없이 개입하고 난 뒤부터였다. 백남준과 보이즈는 그 후에도 여러 차례 퍼포먼스를 함께 하였으며 특히 보이즈 신화의 대부분에 백남준이 관여되어 있다. ▒ 독일 부퍼탈에서 음악을 전시함 63년 백남준은 독일 유학 시절에 부친이 보내주는 학비로 생활을 해나가고 있었다. 그런데 5·16군사혁명이 나면서 재산이 몰수되는 등, 집안이 어렵게 되자 부친은 학비를 더 이상 부쳐줄 수 없다는 연락과 함께 마지막 송금을 하게 되었다. 그 마지막 송금액으로 그는 텔레비전 13대 샀다. 그리고 3월에 독일의 소도시 부퍼탈에서는 텔레비전 13대가 동양의 젊은 예술가 백남준에 의하여 호되게 괄시 당하고 억압당하는 매우 공격적인 전시회가 열렸다. 백남준은 이 전시회에 '음악의 전시-전자 텔레비전'(Exposition of Music-Electronic Television)이라는 제목을 붙였다. 음악을 전시하겠다는 발상에다 그 전시가 전자 텔레비전과 관계가 있다는 암시가 깔려있다. 이 전시는 오늘날 비디오 예술의 첫 전시회로서 백남준 신화의 첫 페이지에 기록되었다. '음악의 전시-전자 텔레비전' 전시는 역사에 남는 사건이 되었다. 이 전시회는 당시까지 음악가나 행위 예술가로 알려져 있던 백남준이 텔레비전이라는 예술 영역을 새로 개척한 이벤트인 동시에 비디오 역사의 장을 연 문제의 전시이다. 그는 13대 가운데 12대의 텔레비전을 전시하면서 텔레비전의 기능을 온전히 살려둔 것은 거의 없었다. 어떤 것은 영사막을 거꾸로 뒤집어놓거나 관객이 발로 밟아야 기능을 하도록 조작해 놓기도 하였다. 어떤 것은 영사막을 조작하여 하나의 가느다란 선으로 묘사하였고 이것을 'TV 참선'으로 제목을 붙였다. 배치 방법도 의도적으로 무질서하게(우연적으로) 유도하였으며 관객이 접근하여 매만지거나 건드려야 작동되도록, 즉 TV 문화를 관객의 지배 하에 둔 것이 특징이었다. 이 전시회의 기본적인 개념은 60년대 대중 문화의 성상이며 우상이던 텔레비전을 공격하고 해체시키는 것이었다. 텔레비전을 '라디오+그림'으로 해석해 볼 때 음과 이미지의 결합은 예술에서의 혁명에 가까운 것이다. 그러나 이 전시회는 관객이나 언론으로부터 크게 환영받지는 못하였다. ![]() 64년 6월, 미국 뉴욕에서는 제2회 뉴욕 아방가르드 페스티벌이 전위 음악가이자 플럭서스 예술가인 샬로트 무어만과 백남준은 '괴짜들'을 멋지게 공연한 뒤, 당시 뉴욕 미술계를 강타하고 있던 팝아트의 물결을 응시하면서 생동감 넘치는 뉴욕에 매료되어 정착하였다. 그곳에는 케이지가 있었고, 플럭서스의 동지인 조지 마치우나스, 알란 카프로우, 조지 브레히트, 벤자민 패터슨, 앨리슨 노울즈 등 독일에서 만났던 친구들이 그의 뉴욕 정착을 적극 돕고 나섰다. 무어만은 헌신적이고도 열정적인 도움으로 백남준에게 매우 큰 정신적인 동반자가 되어주었다. 이들은 관념적 예술 형식을 버리고 원하는 것이면 무엇이든지 예술의 이름으로 시도하였으며 신체적인 밀착 공연을 벌인 것은 물론 심지어 외설적 공연 혐의로 경찰에 체포되어 재판까지 받는 등 스캔들도 일으켰다. 당시 뉴욕 예술계는 예술과 외설 시비에 대한 차별성 및 예술적 표현 자유의 확보를 위하여 이들의 재판을 적극적으로 후원했다. 그 결과 넬슨 록펠러 주지사는 외설과 예술의 표현 자유는 다르다는 최종 판결을 발표하게 되었으며 이들은 영웅이 되었다. ![]() 백남준은 데뷔 초기에서부터 지금까지 텔레비전의 대중 지배에 대한 역기능을 놓고 예술적 해석을 가함으로써 비디오 예술의 시조가 되었다. 그의 예술은 이 때문에 늘 공격적이고 반미학적이며 매체 저항 의지를 담고 있다. 또 관객이 다양한 방법으로 작품에 관계하고 작품과 함께 즐길 수 있는 차원으로 발전되었는데 관객 참여 방식에 의한 예술적 실천은 백남준 미학의 중요한 하이라이트이다. 그는 참여와 소통을 전제로 하지 않는 예술적 실천은 예술의 독재, 또는 독백 예술로 간주하였다. 백남준 예술의 재미는 역시 예술과 대중의 만남이며 예술의 대중화를 위한 시도이다. 예술 대중주의를 위한 백남준의 시도는 바로 인간화된 예술을 향한 도전이었으며 그의 시각은 그래서 위력적이다. 백남준은 단순히 비디오 예술의 첫 개척자나 시행자가 아니라 새로운 비디오 예술 도구나 방법론을 개발해 선구자가 된 것이다. 그가 개발한 비디오 기술들을 모두 열거할 수는 없지만 특히 자석을 이용하여 텔레비전의 이미지를 뒤틀리 하면서 예술적으로 바꾸었던 시도는 후배 비디오 예술가들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또 신디사이저를 개발하여 비디오카메라가 사실적으로 담아내는 다큐멘터리 속성을 다양한 컬러와 이미지효과를 곁들여 텔레비전의 이미지와 다른 비디오 예술을 창조한 것은 백남준의 중요한 업적 가운데 하나이다. ![]() # by 최미성 | 2004/06/05 23:10 | 트랙백 | 덧글(0)
작년에 수업중 교수님이 사물의 대해 다시 한번 생각을 하게 만드는 책이라고 소개 해주셨다.
그래서 읽게 되었는데 아~대단하다.는 감탄사가 저절로 나왔다. 책 제목은 '한국인의 손, 한국인의 마음' 이다.저자는 이어령. 자! 그럼 맛보기로~ㅋ ![]() 어느 집에 가도 가위없는 집은 없다. 그리고 동양이든 서양이든 옛날 무덤에서 가장 많이 나오는 유품 중의 하나가 바로 그 가위이다. 우리나라 역사상 가위는 결코 긍정적인 것이 못 된다. 실을 자르는 죽음의 여신의 손에 들려 있는것도 가위이고 삼손의 머리칼을 자른 데릴라의 그것도 다름 아닌 가위였다. 가위는 지렛대의 원리를 이영하여 무엇을 자르기 위해 고안된 도구이기 떄문에 자연히 역역 노릇을 해올 수 밖에 없었다. 바늘, 실, 가위로 이루어지는 반짇고리의 세계에서 가위는 바늘이나 실과는 이질적인 존재로 늘 소외되어 온 것이 사실이다. 정다운 부부처럼 떼놓을수 없는 인간관계를 '바늘 가는 데 실 간다'라도 표현한 속감이 있듯이 그것들은 서로 봍어 다니게 마련이다. 가위와는 반대로 바늘과 실은 헤진 것은 꿰매고 끊긴 것을 봉합한다. 더구나 실은 면면히 이어져가는 연속성을 상징한다. 그래거 돌잡이가 돌상에 놓인 실꾸러미를 집으면 부모는 장수할 것이라고 믿고 좋아한다. 그에 비해서 가위는 이어져 있는것은 자르고 함께 있는것을 베어낸다. 분단,절단,제거의힘으로 작용된다. 특희 가위는 글을 쓰는 사람에게는 공포의 대상이 된다 왜냐하면 글이나 영화를 검열하는 것을 흔히 '가위질' 이라고 말하고 있듯이 가위는 표현의 자유를 억압하는 최대의 적이기 때문이다. 서양에 더는 또한 남의 글을 훔치는 표절의 가위에 비유하고있다. 생김새까지도 부정적인 표지인 X자를 닮아서 우리는 보통 들린 것을 가위표라고 말한다. 그러나 용도도 생김새도 다 같이 사랑받지 못한 가위의 이미지를 역전시켜 그 일탈의 시적 효과를 만들어 낸것이 바로 한국의 엿장수 가위이다. 우선 그생김새를 보면 끝이 무디고 날이 어긋나 아무것도 잘나낼수 없게 되어있다. 그야말로 가위에서 가위의 기능을 가위질해 버린것이 엿장수 가위이다., 엿장수가위는 자르는 것이 아니라 소리를 내는 음향효과에 그기늘을 두었기 떄문이다. 절단작용을 청각작용으로 전환시킨 순간 가위는 악역에서 사랑의 주역으로 바뀌고 만다, 그 모양도 이미 X표가 아니다. 순박한 검은 먹새의 무딘쇠조각은 십자가의 마찬가지로 서로 다른것을 결합시키는 융합의 상징물로 보여진짜. 실제로 엿장수가위소리에 아이들이 따라다딘다. 그래서 엿장수 아저씨의 가위소리는 늘 현실과 꿈결 속에서 한가롭게 들린다. 그리고 그 가위는 무엇을 잘라내는 공포, 프로이드사 말하는 거세 컴플렉스의 끔찍한 꿈이 아니라 후한 정을 떼어 주는 훈훈한 덤으로 느껴진다. # by 최미성 | 2004/06/05 22:57 | 트랙백 | 덧글(0)
연필로 스케치한거.
나는 시계를 아주 좋아한다. 요즘은 거의 안 사지만 예전에는 친구들이 우리집이 시계빵하는 줄 알고있다. 시계중에서도 큰 시계를 좋아하는데 시계 마저 여자시계 남자시계 이렇게 나눠져 있는게 별루다. 꼭 내가 좋아하는 디자인의 시계는 점원이 그거 남자껀데요~그런다 ㅡ.ㅡ 그래도 되게 맘에 들면 사는데 그래도 영~ ㅋ 자~내가 스케치한 시계는.. 한 재질이 아닌 두가지가 믹스되서 디자인이 되었음 한다.ㅋ 바늘 부분은 메탈느낌을주고 손목부분을 감싸는 곳은 천으로 잘못하면 이상하게 될수도 ㅋㅋ 자~알 디자인 해야~ㅋ 언제가 될 지 모르겠지만 한번쯤 꼭 내가 디자인한 시계가 시중에 나왔음 좋겠다, 그 날이 올때까지 화이링~~! ![]() # by 최미성 | 2004/06/05 22:37 | 트랙백 | 덧글(0)
2004.5.27
대구 컨벤션 센타에서 대한민국 국제모토사이클쇼를 했다. 오토바이에 대해서 몰라서 그런지 다 삐까뻔적? 해 보였다, 가격도 천차만별이었는데 작게는 몇십만원부터 많게는 몇천만원까지 있었다, 그중에 제일 마음에 들었던 코멧 650! 국내 최초의 650cc를 자랑했고 디자인에 있어서도 정열적인 파워를 자랑했다. 너무 모르고 너무 많아서 어떻게 볼 지 몰랐지만 모토사이클의 정열적인 파워와 강인함 섹시함을 흠뻑 느낄 수 있었다. 아! 레이싱걸의 몫도 더욱 더 모토사이클을 돗보이게 했다. ![]() # by 최미성 | 2004/06/05 22:22 | 트랙백 | 덧글(0)
![]() 이땅의 많은 디자인된 제품중에 조명기구만큼 종류가 많은 게 있을까? 이렇게 많은 종류의 조명기구를 두고.. 우리나라의 대부분의 집에서 어둠을 밝히는 조명등으로 오로지 형광등만을 사용하는게.. 개인적으로 상당히 불만입니다. ![]() Sigi Bussinger가 디자인한 이 파리모양의 조명을 처음 봤을때..재미있다!는 생각이들었다. 정말 필자도 어디가면 한 재미있는 디자이너라는 소리 종종 듣지만.. 정말.. 진짜..재미있는 사람 일것 같다 ㅋ ![]() 프라스틱으로 파리모양의 인형을 찍어내서 그 눈에 불이들어오게 디자인을 했다면.. 어땟을까 생각을 본다. 만들기 나름이겠지만.. 아마 무지 유치했을것 같은데.. 그게 직설법 이라면.. 이건.. 은유적 표현 에 해당하는 디자인이라 해야될까? ![]() 부품을 하나하나 따져보면... 전혀 파리스러운것이 없습니다. 25왓트짜리 전구하나, 차를 끓일때 쓰는 티백, 철사가 삐져나온 전구소켓, 곤충날개모양 천쪼각.. 이런것들이 모여 파리의 느낌을 준다는 사실이.. 재미있고.. 아이디어스럽다. ![]() 빛이 그리 밝지는 않다. 무드등이라 해야하나.. 뒷다리에 나사로 고정할수있는 홈이 있어서.. 벽에 나사로 고정시켜놓을수 있다.. 역시.. 파리는 벽에 붙어있어야 제맛(?)이 아닐까?ㅋ ![]() # by 최미성 | 2004/06/05 19:46 | 트랙백 | 덧글(1)
기존의 재질을 탈피하고 만든제품이다.
모니터도 이런거 생기면 참 편리하겠다. 훨씬 가벼워지고 무거운노트북을 이리저리 안 가져 다녀도 되고 .. ![]() ![]() ![]() # by 최미성 | 2004/06/05 19:28 | 트랙백 | 덧글(2)
위대한 사람은 외로운가? 아흐~나도 외로버~~ㅋ
![]() 르네상스시대의 천재거장 미켈란젤로가 사실은 영화 ‘레인맨’에서 더스틴 호프만이 연기한 것처럼 편집적인 자폐증환자였다는 학설이 제기됐다. 1일 AFP통신에 따르면 아일랜드 더블린에 있는 트리니티대학의 마이클 피츠제럴드교수와 영국 파이브 보로스재단의 무함메드 아르샤드박사는 “미켈란젤로의 행적을 조사한 결과 자폐증 유무를 결정하는 고기능자폐증인 애스퍼거신드롬이라는 증상이 나타났다”고 말했다. 자폐증환자들은 다른 사람과의 대화나 의사소통에 어려움을 겪고 감정을 통제하지 못하는 것으로 알려졌는데 미켈란젤로역시 뛰어난 재능과는 달리 대인관계는 완전히 낙제점을 받았다. 이런 미켈란젤로의 성향은 어린 시절 아버지와 삼촌들의 학대에서 기인한 것으로 보이는데 이들은 미켈란젤로의 재능을 인정하지도 않았고 거의 매일 어린 미켈란젤로를 때린 것으로 알려졌다. 처음 이 천재의 재능을 발견한 사람은 미켈란젤로가 14살 때 3년간 도제수업을 받은 예술가 도메니코 기를란다이오인데 기를란다이오는 “이 소년에 그림에 있어서만큼은 평생을 이 일? ?바친 나보다 우수하다”고 말하곤 했다. 보통 자폐증증상을 보이는 사람은 어느 특정분야에서 놀라운 집중력을 보이는데 영화 ‘레인맨’에서 더스틴 호프만은 숫자를 외우는데 천부적인 재능을 보이지만 미켈란젤로의 경우 그림과 영상을 기억하는 능력이 탁월했다. 그 증거로 미켈란젤로가 남긴 명작 시스틴성당 벽화를 보면 성서에 나오는 인물 대부분의 모습을 마치 눈으로 직접 본 듯한 느낌을 준다. 미켈란젤로와 비슷하게 영상분야에서 편집증이 있는 자폐증을 보인 사람은 유명 건축가 존 내쉬(1752~1835년)가 있었다. 피츠제럴드는 “미켈란젤로의 경우 감정을 통제하지도 표현하지도 못해 동생의 장례식에서도 슬픈 기색을 나타내지 않아 많은 사람들이 냉정한 사람이라고 손가락질했다”며 “대화 도중에도 갑자기 자리를 비우기도 해 다른 사람들을 어리둥절하게 했다”고 설명했다. 학자들은 또 “아마 미켈란젤로의 아버지, 삼촌 그리고 형제 중 한명도 같은 질환을 앓은 것 같다”고 말했다. # by 최미성 | 2004/06/05 19:07 | 트랙백 | 덧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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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글 잘보고갑니다 ㅎ..
by ko12sk at 09/30 수행평가에 필립스탁을 .. by 임수정 at 04/24 아하! 키~보드ㅋㅋㅋ고.. by 최미성 at 06/08 마우스?? 키보드가 아니고? by §봄꽃§ at 06/08 엑~ 징그러~ㅋㅋ 언니.. by §봄꽃§ at 06/08 언니.. 나도 눈 가려줘~.. by 세르게이 at 05/29 와~~감솨~꾸벅~^^ by 미리 at 04/12 내가 쫌 이렇다! ㅋ by 최미성 at 04/09 몰라~ 어떤거 링크? by 최미성 at 04/09 와~~덧글도 미대인답게.. by 미리미리 at 04/09 | ||||